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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4살 손자의 말, 말, 말

by 달빛3242 2015. 1. 25.

요즘 우리 부부는 손자들 보느라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겨울철이라 시골에 할 일도 별로 없고 해서 구정까지는 아들네 집에서 손자들을 돌봐주기로 했다. 

두 살, 네 살 천방지축 손자들과 있으면 재미도 있지만 보통 어려운게 아니다.

특히 아침에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며늘아기가 일찍 출근하고 나면

잠 자는 큰손자를 깨워서 대소변 처리해 주고, 밥 먹이고,

옷 입혀서 늦지않게 어린이집에 데려다 줘야 한다.

작은손자까지 두 녀석들 뒤치다꺼리 하다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겨우겨우 아침 겸 점심으로 때우기 일쑤다.

주말이 되면 녹초가 되어 대전집으로 돌아와 휴식 겸 충전의 시간을 갖어야 한다.

 

어려운 중에도 큰손자와의 대화가 웃음을 주기도 하고 안쓰러움을 주기도 한다.

 

 

하루는 손자가 끈금없이 할머니에게 묻는다.

"함머니, 함머니는 붕알 있어요 없어요?"

"함머니는 붕알 없어요."

"빈이는 붕알 있어요. 아빠도 있고 아기동생도 있어요."

"그래?"

"붕알 있으면 남자예요. 하버지, 하버지는 붕알 있어요 없어요?"

헐!

 

 

항상 존댓말을 쓰는 손자가 묻는 말에 '응' '응' 하면서 반말을 하는 것이었다.

"빈이, 어른한테는 '응 응'하면 안돼요. '예 예'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엄마는 대구함머니(외할머니)한테 응 응 해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따지고 든다.

"엄마는 대구 함머니한테 맞아, 맞아 라고 하잖아요."

 

 

엊그제는 9시 뉴스를 보는데 손자가 하는 말이

"하버지, 사람이 한 명 죽었어요."

"왜 죽었어요?"

"불이 나서 죽었어요."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4살 손자가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해서 물었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죽으면 숨도 못 쉬고, 못 움직여요. 병원차하고 경찰차가 와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돼요."

 

 

요즘은 너무도 안타까운 어린이집 폭행사건이 자주 보도가 되어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손자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다.

손자가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목욕부터 시키는데 온몸을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혹시 멍자국이 있는지, 어디 이상이 없는지.

손자는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 돌아오면 제법 자세하게 전달하는 편이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23일) 어린이집에 다녀온 손자가 뜻밖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하버지, 오늘 선생님이 빈이 때찌했어요."

"발로 이렇게 때찌했어요."

발로 차는 시늉까지 하면서 선생님을 이르는 것이었다.

정말로 선생님이 어린 것을 발로 찼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가슴이 철렁했다.

손자가 편식을 하고 밥을 천천히 먹는 편이라서 점심 시간에 혼나지 않았을까 싶어서 자세히 물었다.

"선생님이 점심 시간에 때찌했어요?"

"아니예요. 크림 바를 때 때찌했어요. 빈이는 밥도 잘 먹고 요플레도 싹싹 다 긁어 먹었어요."

"그런데 왜 선생님이 우리 빈이를 때찌했을까?"

"..."

왜 혼났는지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심하게 장난을 쳤는가 보다.

"하버지, 월요일날 어린이집에 가면 하버지가 선생님 때찌해줘요."

"눈을 이렇게 무섭게 하고 어린이집 선생님 때찌해야 돼요."

손자는 눈을 크게 뜨고 제 딴에는 최대한 무서운 얼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하버지, 절대로 용서해 주지 말아요."

손자는 선생님을 절대로 용서해 주지 말라는 말을 여러번 반복했다.

"선생님이 빈이 때찌하면 이렇게 쳐다보고 '이놈!' 할거예요. 빈이는 무서운 사람이 될거예요." 

눈을 부릅뜨고 선생님과 맞짱을 뜨겠다는 네살배기 우리 손자,

벌써부터 적개심을 갖게 되다니 마음이 아렸다.

제 할머니가 물어봐도 일관성있게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손자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함머니도 절대로 용서해주지 말아요."

"선생님은 우리 빈이를 굉장히 사랑하시는데 한번만 용서해주면 안될까?"

"안돼요. 용서해주지 말아요."

손자가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맞긴 맞았는가 보다.

손자의 말대로 선생님이 손으로 때린 것이 아니고 발로 찼을까싶어 다시 물었다.

"선생님이 왜 우리 이쁜 빈이를 손으로 때찌했을까?"

"선생님이 발로 이렇게 때찌했어요."

역시나 손자가 발로 차는 흉내까지 내며 일관성있게 말하는 걸로 보아 발로 찼다는 확신이 섰다.

우리는 대전에 갈 시간이 되어 며늘아기에게 자세히 알아보라고 하고 아들네 집을 나섰다.

 

대전에 와서도 자꾸만 손자 일이 맘에 걸렸다. 

'크림 바를 때 발로 찼다고?'

그 때의 상황을 곰곰이 상상해 보았다.

'보육교사는 어린이들이 손을 씻고 나면 손에 크림을 발라줄 것이다.'

'그러면 한 손에는 크림 통을 들었을 것이고 또 한 손에는 크림이 둠뿍 묻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손으로 때리지 못하고 발로 찼을 것이다.' 

이렇게 상상을 해보니 발로 찼다는 손자의 말이 분명히 거짓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자는 아직까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CCTV라도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월요일날 면담을 해야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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