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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망신산에 오르다

by 달빛3242 2015. 5. 3.

4월 24일

 

어렸을 적부터 산을 좋아해서 야트막한 고향집 뒷산에 자주 올라가곤 했었다.

산에 오르면 멀리 건너편으로 또 다른 마을을 감싸안고 있는 높은 산이 보였다.

부여군 은산면에 위치하고 있는 '망신산'이 바로 그 산이다.

무슨 이유인지 어린 마음에 그 산에 꼭 한 번 올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게 되었다.

어른들 말씀에 산꼭대기에 무덤이 하나 있다는 것 말고는 달리 특별한 것이 없는 산인데

누구 말마따나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꼭 오르고야 말겠다는 꿈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고시절 고향을 등지고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망신산은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그러다가 지난 3월 계단용 돌을 사기 위해서 부여군 외산면에 다녀오는 길에

부여 백제 휴게소에 들르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어렸을 적 동경의 대상이었던 망신산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것이었다.

반가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어렸을 적 꿈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고향마을 뒷산에서 볼 때는 굉장히 높고 가파르게 보였던 산이

휴게소에서 바라보니 오른쪽 능선이 매우 완만하게 보여서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년 시절의 꿈이었던 '망신산에 오르기'를 버킷리스트에 올리고 꼭 도전해 보리라 마음 먹었다.

 

동생에게 나의 계획을 이야기했더니 같이 가겠다면서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었다.

언니와 77세의 막내 외삼촌도 흔쾌히 동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망신산 오르기'에 함께 하기로 한 인원이

막내외삼촌을 비롯하여 언니, 동생, 옆지기까지 모두 5명이 되었다.

 

드디어 4월 24일 D데이~

등산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부여군 구룡면에서 외삼촌, 언니, 동생과 합류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외삼촌을 선두로 은산면으로 향했다.

 

외삼촌의 길 안내로 헤매지 않고 쉬운 등산로를 찾아 올라갔다.

외삼촌은 건강상 등정을 하지 않고 우리가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올 때까지

산 아래에서 기다리시기로 했다.

 

가파른 고개를 넘고

 

낙엽이 두껍게 쌓여 푹푹 빠지는 산길을 천천히 걸으며

심심찮게 눈에 띄는 고사리도 꺾고 달래도 캐면서 여유롭게 올라갔다.

막 피어나는 연두빛 신록과 야생화들이 너무나 풋풋하고 아름다웠다.

 

산 정상이 가까워지자 조팝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향기가 진동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혼자서 뒷산에 올라가 조팝꽃과 진달래꽃을 한다발 꺾어서

오빠 무덤을 향해 힘껏 던졌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5학년이었던 오빠는 뇌염으로 하늘나라로 떠나버렸었다.

 

오빠와 썰매도 타고, 얼음배도 타고, 소꿉놀이보다는 오빠를 따라다니며 전쟁놀이를 더 즐겼던 나의 유년시절,

어렸을 때의 경험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 같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드디어 망신산 정상!

정상에 올라가면 꼭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 있었다.

하늘을 향해 가장 그리운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오빠!"

구만리 장천 어디선가 흐뭇한 표정으로 우릴 지켜보고 계실 것만 같은

사무치게 그리운 이들이다.

뭔가 뻥 뚫리는 것 같은 쾌감과 함께 콧날이 시큰거려 옴을 느꼈다.

 

어린 시절 그렇게 높아보이던 망신산은 해발 345m로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었다. 

등산이라기 보다는 산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산이었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정상에 있다던 무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커다란 무덤은 조팝꽃으로 뒤덮여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무덤인지 뭔지 분간이 어려웠다. 

숲이 너무 우거져서 고향마을 뒷산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지만

묵은 숙제 하나를 해결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언제나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는 옆지기와 함께

 

등산할 때 갈증을 해소하는데는 오이가 최고라며 아무도 몰래 오이를 챙겨 온 자상한 옆지기

 

 

 

정상에서 옛추억을 되새기며 한참 동안 머물다가 20여 m쯤 내려왔는데

산 아래에서 기다리겠다던 외삼촌이 올라오고 계셔서 너무나 반가웠다.

우리 자매는 역사학자이면서 로맨티스트인 막내 외삼촌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낙엽 위에 앉아 간식으로 기력을 충전하고나서 다시 외삼촌을 따라 정상에 올라갔다.

외삼촌으로 부터 망신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두 번이나 정상 정복을 한 셈이다. 

 

망신산 아랫쪽에 지천으로 깔려있던 현호색

 

산을 내려와 은산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내년 봄에도 또 뭔가 일을 벌이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깜짝쇼 내지는 엉뚱하고 특별한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이 자매들을 누가 말릴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버킷 리스트

'망신산 오르기'를 실행한 이 날을 오랫동안 행복하게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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