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2일
호텔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 오후에는 막고굴로 향했다.
돈황 관광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막고굴이라 한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모두가 '막고굴, 막고굴' 하는지 기대가 되었다.
돈황에서 남동쪽으로 25㎞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막고굴은
명사산 끝자락의 절벽에 만들어져 있다.
이 막고굴이 처음 조각되기 시작한 것은 동진(東晋)때인 366년이다.
승려 악준(樂樽)이 명사산(鳴砂山)과 삼위산(三危山)에 이상한 빛이 있음을 알고
석벽을 파서 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4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역경사, 석공, 도공, 목공, 시주 등이 드나들면서
하나, 둘씩 굴을 팠으며 그렇게 파게 된 크고 작은 굴의 전체 수가
약 천 개 가량이 된다 하여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이 방대한 막고굴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 붕괴와 인간들의 무지한 파괴에 의해서
현재 492개의 동굴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리는 제 17굴은
송나라 때까지의 경전이나 문서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서하(西夏)의 지배에 있을 때 봉쇄되었다가 1900년에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막고굴의 전모가 드러나고 전세계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아쉽게도 장경동의 유물들은 약탈로 인해 수 만 점이 해외로 유출되어
현재에는 영국을 비롯한 10여개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분산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남의 나라 유물이지만 이제는 훔쳐간 것들을 제자리에 갖다놔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중국 당국의 지나친 보호로 동굴 안에서는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었다.
막고굴 전문 가이드가 나누어주는 이어폰을 끼고 동굴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동굴 안의 유물은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상)과 벽화(壁畵)가 주를 이루는데
성능이 떨어지는 가이드의 손전등으로는 부분부분만 겨우 비춰줄 뿐
동굴 안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들이 선물한 고성능의 소형 손전등을 안 가지고 온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개인적으로 소상보다는 천장과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정밀하면서도 아름다운 벽화에 더 마음이 끌렸다.
몇 개의 굴을 들락거리며 관람을 했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지
인도의 엘로라, 아잔타 석굴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진한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 누구야!
테러리스트?
알카에다?
육혈포강도단?
강한 햇볕에 대항하여 완전무장한 친구들의 모습이다.
누가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다며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던 순간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친구는 완전 미라 따라하기다.
우리는 이런 무시무시한 모습을 하고 막고굴 관람에 나섰다.
옛날에는 많은 물이 흘러갔음직한 개울이 지금은 바짝 말라있다.
보는 것 만으로도 목이 탄다.
이 개울을 건너면 막고굴이 나온다.
드디어 막고굴이다.
사진의 왼쪽 아래 부분을 보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부터 카메라는 무용지물이다.
여러 동굴을 다니다 보니 다리가 아팠다.
동굴 밖 나무 그늘에 앉아 쉬어가며 동굴을 관람했다.
어디에서나 단체 인증샷은 기본이다.
막고굴 관람을 그야말로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술렁술렁 마치고
서진 벽화묘로 이동했다.
서진 벽화묘
광활하게 펼쳐진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야트막한 봉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 여겨 보지않으면 존재감 마저 느껴지지 않는 흙무더기 같은 모습이었다.
이곳은 서진시대 (265~317년)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고분군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지역이라고 한다.
무덤 앞에는 조그마한 관리소 겸 기념품 가게 하나만이 달랑 있을 뿐
별다른 보호를 하지않는 것 같아 별로 중요한 유적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런데까지 관람하러 오나? 하면서 관리소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소 안에는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실크로드 관련 서적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전문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다음 그를 따라 어두운 묘지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가이드의 손전등이 묘실 안을 비추는 순간
천하의 막고굴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전율이 느껴졌다.
무령왕릉을 처음 대하던 때의 감동과 맞먹는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묘실은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 돔 형태의 천장을 만들었고
관을 두었던 자리, 등잔을 놓았던 자리 등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부엌과 화장실까지 갖춰져 있어서 마치 이승에서의 집처럼 꾸며 놓았다.
벽에는 꽃무늬, 구름무늬 등 여러가지 아름다운 채색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벽화만 보아도 묘지 주인의 지위, 재산 정도, 취미 활동 등을 잘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곳의 벽화는 돈황 석굴 그림의 전신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손전등 빛으로는 너무 어두워서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묘실은 참으로 세밀하고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다.
안타깝게도 도굴의 흔적으로 천장의 한쪽이 뻥 뚫려있었는데
다행히 도굴꾼의 기술이 교묘하고 치밀해서
천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개의 묘지 중에서 현재는 6호와 7호 두 곳의 묘실만을 개방하고 있다.
채색벽화는 한 장도 못 찍었는데 가이드는 벌써 손전등 불빛을 거두어 버렸다.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사주 야시장 풍경
약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져서 각자 흩어져 시장 구경에 나섰다.
다양한 기념품과 먹거리가 가득한 야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쟁반처럼 둥글고 큰 빵이었다.
웬지 맛이 있을 것 같아서 바디랭귀지로 간신히 가격을 물어보고 빵을 샀는데
다른 친구들도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빵을 우리가 산 가격의 반값도 안되게 주고 산 것이었다.
바가지는 썼지만 어째튼 관장히 싼 가격의 빵이었다.
맛은 담백하고 구수해서 먹을 만 했다.
야시장에서 만난 귀여운 아기
손자 생각이 간절했다.
야시장 기념품 가게
반탄비파(反彈琵琶) 상
기념품 가게의 가장 중심에 진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최고의 인기상품임이 분명하다.
반탄비파상은 막고굴 벽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비파를 등 뒤로 돌려서 연주하는 모습의 여인상이다.
돈황의 상징물로 시내 중심가에 동상으로 제작되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밤에는 발맛사지로 피로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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